며칠 전 이스라엘 최대 일간지 예디노트 아하로노트 3면 기사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지난 3월 15일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는 독일 나치 치하에서 자행된 유대인 학살 자료를 전시해 놓은 야드바셈 유대인학살박물관 개관식이 열렸는데, 세계 40여 개국의 대통령과 수상, 외무장관이 참석한 최대 외국 국빈이 참석한 대규모 행사였다. 그런데 일본은 이 행사에서 제외가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유엔에서 상당수 유엔 부담금을 기부하고 있으며,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전포석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향한 외교적 힘을 과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유엔 주요국가들은 모두 초청받았지만 굳이 일본이 초청대상에서 제외된 사건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그들 자신의 왜곡된 역사의식이 세계 무대로부터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이유인즉 일본이 세계주요 국가들 초청의 자리로부터 이번 유대인학살박물관 개원에 즈음해 자신의 역사를 이 유대인학살박물관 개원에 편승하려 했다는 이유이다. 올 해가 2차대전 60주년을 맞이하는 해로서 독일 나치치하에서 유대인의 학살 및 핍박에 종지부를 찍는 해로서 박물관 개관 시기와 함께 맞추어 세계정상을 함께 초청하여 큰 행사를 벌린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교묘하게도 자신들 역시 원폭 피해 60주년을 맞는 해로 두 사건의 의미를 함께 되새길 수 있게 박물관을 함께 공유해 줄 것과 유대인의 희생을 성공적으로 부각시킨 대표적인 상징인 유대인 학살박물관을 일본의 원폭피해를 알리는 장소로 쓸 수 있도록 요구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하였으며, 이번 초청 행사에 빠진 것이라는 분석이다. 어쩌면 일본 역시 2차세계대전의 가해자이자 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행사에 자기 반성은 커녕 원폭 피해자인양 숨은 그릇된 의도가 들통이 난 것으로 일간 신문은 보도 하였다. 하지만 일본과 달리 독일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죄방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크게 보도되었다.
지난 2월 2일 독일 쾰러 대통령이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이스라엘을 방문했을때 예정된 독일 대통령의 이스라엘 국회 연설을 앞두고, 이스라엘 국회에서 독일 대통령의 독일어 연설을 반대하였다. 이유는 나치 치하에서 듣던 공포의 독일어를 유대국가 이스라엘 국회에서 울려 퍼지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현재까지 독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독 감정 정서는 아직도 당사자나 직계 가족둥의 국민은 물론 현 국회의원들 중에도 직접적인 피해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법무장관이었던 현 야당의 대표인 토미 라피드 의원도 부모가 나치에게 희생당한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하지만 일부 극우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국을 방문한 외국 대통령의 예우 차원에서 독일어 연설을 허락해야 한다고 국회는 결정하여, 독일 대통령의 연설은 어떤 불상사나 외교 결례가 일어날지 모르는 긴장 속에서 시작되었다.하지만 퀼러 대통령의 화해와 감동의 진실어린 연설을 통하여 그 불안감은 일시에 사라졌다. 그는 연설의 첫 문장을 애써 배운 히브리어로 또박 또박 먼저 읽어내려간 뒤 이후 자국어 독일어로 연설문을 읽어나갔다.
연설을 이어 내려가던 중 독일 대통령은 과거 독일의 잘못과 단죄에 대한 부분과 반성의 연설문에서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굵은 눈물방울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유대인 의원들은 물론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고 다음날 이스라엘 신문에는 독일 대통령의 두 눈물이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이 기사를 읽고 나는 위 독도 문제와 기독교에 관한 질문에 깊은 상념에 잠겨 버렸습니다. 비단 독도의 문제는 영토의 문제로서 기독교인이냐 비기독교인이 반성하고 언급하고 할 그런 부분의 문제를 일단 넘어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결론을 내려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는 정치적 입장에서 다른 하나는 기독교적 관점에서입니다.
정치적 입장에서 본 다면, 단연 국제적으로 여러가지 면에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이 다시금 부흥하려는 보수집단들의 의도를 면밀히 엿볼 수 있습니다.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의 뿌리는 어쩌면 사무라이 정신에 입각한 자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 역사의식은 할복은 있을 지언정 자기 잘못에 대한 반성에 대하여 남에게 머리를 숙이는 일은 없는 자들이 아닐까 노파심에 넘겨 짚어 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왜곡되고 잘못된 역사의식이 바로 잡힐 리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순간 순간 '와' 하고 들끓어 한 순간 감정적으로 일어났다가 감정이 식어지는 냄비정신이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은 일본 정부에서의 철저하게 계산된 공식하에서 일어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은 한번씩 거드리는 그들의 찔러보는 습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대통령이 3.1절 기념식에서 과거사 문제를 거들고 일어났을때 일본 정부의 반응은 '국내용'이라는 평가절하 발언을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일본정부에서 바라보는 한국민에 대한 의식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에 대하여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은 짚어가고 비판 할 것은 비판할 수 있는 역사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제 위의 긴 서론의 너머 주요 질문의 답변을 하고자 합니다. 이제 기독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각자 자기의 입장과 관점에서 문제를 분석하고 비판할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관점에서 무엇보다 진지하게 사건이나 역사를 보고 비판하고 분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계실 것인가에 대하여 나의 머릿 속에서 맴돌았습니다. 역사의식이라는 거창한 문구를 제외하고서라도 기독교인은 분명 이 세상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 역사는 바로 카이로스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도서 3:16에 의하면 [공동 번역]그뿐만 아니라 공평무사하게 정의가 이루어져야 할 세상에 불의가 판치는 것을 나는 또 보았다.그리고, 이사야 48:18에 또한 [공동 번역]네가 만일 나의 명령을 마음에 두었더라면 너의 평화는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너의 정의는 바다 물결처럼 넘실거렸으리라. 그리고, 이사야 59:8 [공동 번역]평화의 길은 아랑곳도 없는데 그 지나간 자리에 어찌 정의가 있으랴? 그들이 구불구불 뚫어놓은 뒷골목을 가면서, 평화를 맛볼 사람이 있으랴? 는 말씀 속에서 현 세상의 어두운 단면(세상은 아무리 평화, 정의를 외치지만 그 속에는 자기 이익과 지배, 그리고 정복의 그릇된 욕망이 있음을 우리는 지난 역사 가운데서 뼈저리게 경험한 바 있다)을 아울러 직시해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새롭게 희망을 가질 수 주요 말씀 두 구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아모스 5:24 [표준]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 그리고, 이사야 26:9 [공동 번역]밤새도록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 아침이 되어 당신을 찾는 이 간절한 심정! 당신의 법이 세상에 빛나는 때 세상 주민들은 비로소 정의를 배울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분명한 정의관과 공의관을 비단 신앙인들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배워야 그릇된 역사는 세워지고 올곧게 나아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독도 문제가 불씨가 되기는 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독교인이 오늘이라느 오늘의 현재를 살아가면서 과연 참되고 바른 역사의식 다시 말하면 기독교적인 일직선적 역사관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는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어떠한 개인적인 불순물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에게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이번의 교훈은 쉽게 잊혀지는 역사관 상실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다른 어떤 것들로 인하여 지난 번 문제는 바로 잊혀져 언제 그러하였는가 입니다. 이는 분명한 역사의식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 말은 지속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 두 명의 사과나 발언 잠시 국민들이 들끓어 문제가 확산되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사라지는 그런 냄비근성을 버려야 한다는 것과 더불어 분명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 신앙은 결코 개인적인 문제에 국한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당면한 문제만을 가지고 해결받고 해결되어지는 그러한 하나님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역사의 움직임 속에 하나 하나 간섭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도움은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며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과 같은 자와 같지는 않을 지라도 우리가 먼저 문제의식을 가지며 역사를 바르게 세워 나가는 데 모퉁이 돌이 되어야 함에는 틀림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는 엉클어진 지난 과거 한일정치관계에 의하여 일제시대에 직접적인 피해자와 가족들이 여전히 살아있고 그들이 36년간동안 당한 고통에 억눌려 살았던 한이나 아픈 마음을 지금도 여전히 제대로 풀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신대 할머니들의 요구는 아주 단순합니다. 그들의 진정한 참회와 반성입니다. 옛날 자기들의 윗세대들의 잘못이니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식, 이 문제는 과거 정치사에서 이미 해결된 문제라는 식으로 모든 과거의 잘못을 덮어버리려는 어리석은 발상은 세대가 지나가도 우리는 결코 잊어서도 안되며 잊혀져서도 안됩니다. 어쩌면 이미 독도의 문제 밑바닥에 이러한 기본 문제 해결에 대한 정치적인 미묘한 입장과 서로 다르게 보는 역사인식(한쪽의 그릇된 역사인식을 어떻해서든 덮어보려는 의도와 그릇된 역사인식을 밝혀서 문제확산해 보려는 입장)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앞선 글에서 이스라엘과 독일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서로간의 참된 참회와 용서가 있음은 지속적이고 냉철한 과거 자기 반성으로 일그러진 역사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각오 그것을 지켜보는 불꽃같은 눈동자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일본이 한국을 그렇게 고구마 익었는가 쑤셔 보듯이 한번식 건드리는 것은 그들의 왜곡된 역사의식의 분명한 자기 반성이 없기도 하지만 과거 피해국가들을 얕잡아 보는 그러한 교만한 태도를 버릴때까지 지속적인 관심과 비판을 세우는 것이 결코 비기독교적이지는 않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히려 더 많이 더 자주 그들이 깨닫고 뉘우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릴때까지 가르쳐야 합니다. 세상을 바로 잡는 것 하나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우는 초석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박세종 목사님